이름 없는 이들과 함께 걸으며 시를 긷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해미성지는 조선시대 후기 병인박해 때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신자들 다수는 묘비는커녕 변변한 무덤도 없이 매장당했다. 2014년 해미성지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해 참배실 앞에서 기도하며 “senza name(이름 없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같은 날 그는 이곳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소통하는 만남”을 이끌어 내는 “진정한 대화”를 언급한다.
시인은 무명 순교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대화하기로 결심한다. 시인은 그들이 치명에 이르기까지 걸었을 해미의 곳곳을 순례하며 걷고 또 걷는다. 그들의 피와 눈물이 얽힌 장소에서 시인은 치명자들을 누이로, 형제로, 어머니로, 아버지로 호명한다. 이들이 겪었을 고통과 잔인한 죽음, 못다 피운 삶을 안타까워하던 시인은 마침내 스승에게 받은 호 ‘산울(山 메 산 蔚 풀이름 울)’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린다. “허리 낮춰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발밑에 누운 들풀의 손 잡아” 주며 그들을 “깊이 보듬”는 존재, 즉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지친 영혼의 그늘이 되어” 주라는 것이 그 이름의 무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또한 길의 끝에서 “새봄이 달려오고” 있음을 발견한다. 순례자들이 걸은 그 길이 비록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일지언정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가는 길”이요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길”이며, 그 길의 끝에서 그들은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빛나는 이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 없이 치명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멈추지 않는 걸음걸음을 지켜보며, 시인은 모두가 ‘호모 비아또르(순례하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자신도 육신이 다할 때까지, 강물처럼 흐르듯 이 길을 걷게 될 것임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시집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시의 맞은편에는 프랑스 떼제공동체 안토니 수사(한국명 안선재)의 수려한 번역으로 영역된 시가 실려 있다. 우연이 없다는 시인에게 서산에서 나고 자란 시간은 서산 해미의 순교자들에게로 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익숙한 공간에서 같은 마음으로 다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시인의 발걸음에 주목을 요한다.
글쓴이 : 김일형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고 서산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월간 『시』 제1회 ‘윤동주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눈발 날린다 풀씨를 뿌리자』,『밤의 경계』가 있다. 현재 충남문화예술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안선재
영국에서 태어났다. 1969년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입회했으며 1980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2007년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시를 중심으로 한국의 주요 현대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다수의 시집과 소설집, 단편소설집을 번역ㆍ출간하였다. 2015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 MBE를 받았고, 2024년에는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했다.